어쩌다 보니 계획했던 것 보다 오래 그라나다라는 도시에 머물게 된 나.
누군가에겐 현지인으로. 누군가에겐 여행자로.
어느 하나 정해지지 않은 지금의 나는
가끔 말 그대로 바다 위에 떠 있는 취한 배가 되어 있는 기분이 든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궁금해한 데서부터
철학이나 종교 같은 것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신실한 종교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뇌하는 철학자도 아니지만,
30년 좀 넘게 살아오는 동안,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선
나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익어가는 나의 모습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익어가는 나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더이상 타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이곳 그라나다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현지인도 여행자도 아닌, 혹은 현지인이기도 하고 여행자이기도 한 채로
1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이곳에서 맺어가는 인간관계라는 것에 대해 점점 신중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타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도 어차피 나에게는 아직까지 타지인 그라나다에서
내가 그간 소중하게 쌓아온 인연들도 멀리 떨어져 있고,
내 목숨만큼 소중한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어떻게든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하고
가끔은 나와 취향이 맞지 않은 이들을 만나거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에도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찾아오는 건 깊은 고독 뿐.
그렇다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사람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장담컨데 나의 지인들 그 누구에게도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친절하고 따뜻한 하밋 아저씨, 조용하지만 상냥한 콤파녜라 레베카,
문이 고장난다거나 하는 힘쓸 일이 있으면 언제나 서슴없이 달려와서 도와주시는 이웃분들,
델렝구아 어학원을 통해서 알게 되어 1년이 넘는 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로빈, 바바라, 프랑크 등 좋은 친구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뭐 하나라도 더 배풀어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너무 고마운 난과 에바 자매.
몇 안되는 한국인들이지만 종종 만나 맛있는 음식도 해먹고, 서로 일이 있거나 할 때는 도움을 주기도 하는 한국 유학생들.
이렇게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으면서도 허전함을 느끼는 건
좋게 둘러 대자면 계절이 바뀌기 때문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그 허전함을 매꾸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고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이 나 자신으로 있음에 대한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나는 좀 그런 느낌.
창 밖으로 오늘은 긴 여름의 끝에 찾아온 짙은 구름의 초가을 그라나다 하늘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음악도 듣고, 강의도 듣고, 공부도 하며,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은 어느 새 평온해진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큰 것을 줘도 만족할 수 있지만,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것을 줘도 만족하지 못한다.
라고 하밋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이런 간단한 진리 하나, 한 줄로 읽어버리면 그만인 저 간단한 진실을
많은 이들이 깨닫지 못해 전쟁이 나고 죄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마음 속에 시커먼 블랙홀 하나를 품고 있는 것이리라.
내 블로그의 제목인 작은 행복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며 늘 잊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어느 새 나는 그 작고 소중한 것들의 행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를 어느 시간의 미로 속에서.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헛되리라 생각치 않는다.
이타카로 가는 길.
비로소 내가 그 섬에 도달했을 때 그 섬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이미 나는 이타카로 가는 길에서 많은 것을 얻었을 테니.
그리고 나의 이타카로 가는 길에 발견하는 소중한 보물들을 얻기 위한
진통의 과정이리라.
서늘한 가을바람이 스쳐가는 초가을의 그라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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