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라나다를 걷는 걸 참 좋아한다.
이 맑은 하늘과 뜨거운 태양도 좋고 반짝이는 별빛 아래도 좋고
나에게 이곳을 걸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주어졌다는 것도 좋다.
오늘도 나는 그라나다를 걷기로 했다.
가까이 사는 친구와 오늘 새로 어학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모여 그라나다를 걷기로 했다.
언제나 제안을 하는 것은 나. 산책하자. 는 간단한 SNS 로 길은 시작된다.
오늘은 매일 걷는 알바이신이 아니라 레알레호를 걸어보기로 한다.
오래된 길을 따라, 엘레나를 향한 고백을 지나...
그라나다를 걷는 아주 특별한 방법은 보이는 길, 궁금한 길을 따라 무조건 걷는 것.
저 골목이 궁금하다 그러면 그곳으로 걸어들어간다.
망설일 필요 같은건 애초에 없다.
이곳은 아주 오래된 길들이 살아있는 도시다.
당신이 지금 걷고있는 그 길은 몇십년 전 프랑코의 독재시대에는 어느 아낙네가,
이자벨라 카톨리카 여왕의 시절에는 어느 군인이,
나스리 왕조의 치하 아래에서는 어느 청년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레알레호를 걷는 건 언제나 즐겁다.
특히 그라나다를 처음 만난 사람에게 길을 안내해 주며 걸어갈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마치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손님에게 대접하는 안주인이 된 양, 설레고 들떠서 그라나다의 골목 구석구석을 걷고 이야기한다.
발걸음이 더욱 힘차고 신나는 건 이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 줄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전에 한번 가봤던 야경이 멋진 바를 찾아 걷기 시작한다.
아쉽게도 바에 도착했을 때 문은 잠겨있었고, 아직 해도 지지 않아 야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군데 군데 피어있는 계절꽃들과 색다른 건물들 아름다운 길 구경에 지루하지가 않다.
나는 아름다운 전망을 가진 장소에 나만의 이름을 붙이는 걸 좋아한다.
일전에도 썼던 Mirador de Romantico 로맨틱한 전망대는 바로 이 바 근처에 있는 전망대이다.
나의 전망대에는 아직도 누군가가 써 놓은 Te Quiero ELENA 가 선명하다.
그 누군가는 아직도 엘레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선인장의 꽃들이 봉오리를 맺고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곳의 선인장들은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알바이신에도, 레알레호에도 곳곳에 피어있는 거대한 선인장들이 이곳의 풍경을 더욱 이국적으로 만들어준다.
6월은 선인장이 꽃피는 시기.
다육식물을 키우면서는 그렇게도 피우기 힘들던 꽃이 이곳 선인장들은 누워서 떡 먹듯이 힘차게 마구 피어난다.
그 모습은 그저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거대한 선인장에서 느껴지는 강인한 생명력은 이 대지를 더욱 살아있게 만들어 준다.
오래된 모든 것에 대한 단상
오래된 집도 오래된 길도 어느 하나 박제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몇백년이 된 오래된 집도 여전히 사람이 살고, 특별히 가격이 많이 비싸지도 않다.
그저 필요한 부분만 조금씩 수리를 해서 여전히 사람이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고, 거기다 멋스럽기까지 하다.
이제는 숱하게 사라진 우리네 한옥을 생각해 보면 왜 이곳과 우리는 다른 걸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땅덩이의 크기가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오래된 것을 여전히 생활 속에 끌어들여 사용하는 이들의 모습을 간과할 수가 없다.
사람이든 집이든 사용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게 마련이다.
새것이 주는 화려함도 좋지만 오래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지혜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얻을 수 있는 아주 값진 것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그걸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몇백년 된 집은 죽은 집이 되지 않고 여전히 사람이 살아가는 살아있는 집으로 남아 있다.
몇백년 된 집이든 몇년 된 집이든 부엌의 창가에서 보이는 풍경은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을 먹고, 또 청소를 하고, 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이런 우리네의 흔하디 흔한 일상일 뿐이다.
그 흔하고 흔한 일상이 비로소 담겨져야 집이든 길이든 그 모든 것들은 생명력을 얻는다.
선인장이 태양을 통해서 생명력을 얻듯이.
오래된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사람도 다르지 않다.
이곳에서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새삼 느꼈던 문화의 차이는 존댓말의 유무에서 오는 차이 였다.
우리는 존댓말을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서 만들었지만, 실제로 그 존댓말로 인해 세대간의 차이가 더 생겨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는 배경이 다르다. 웃어른을 공경하고 그것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에서는 인사도 말도 존대를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여기서 지내면서, 우리 부모님뻘 되는 분들과 너나들이를 하면서 (물론 이곳에서도 존대의 표현이 있긴 하지만 친한 사이에서는 '너'라는 Tu 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느낀 점은, 내가 친구에게 하는 말과 어르신들께 하는 말이 같다고 해서 웃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는 거다.
처음 만난 모든 이는 친구.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혹은 나이가 적다고 해서 어린이, 혹은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친구다.
그 중에 나이 많은 이는 삶의 경험이 풍부한 지혜로운 친구. 나이가 적은 이는 아직 풋풋하고 열정이 살아있는 친구.
비록 존대를 꼬박꼬박하지 않더라도 이들은 나이든 이들의 삶의 경험을 존중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존댓말이라는 허울좋은 테두리 안에서 실상은 웃어른들의 말은 구식이라며 흘려듣고, 마치 그들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처럼 그들의 생각 또한 그럴 것 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길도, 집도,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이 쌓이게 마련이고, 그 쌓인 시간은 그만큼의 생명력이 되어 더욱 그들을 빛나게 해준다.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없는 오랜 시간의 가치를 알고있는 이들의 이런 면을 나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란후라이 전망대와의 첫만남
문이 닫혀있는 바를 지나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멀리 그림같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위로 햇빛이 쏟아져 산맥이 마치 분재처럼 빛난다.
빛나는 산맥을 뒤로하고 걸어가다 언덕 위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보았다.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 가보니, 이곳은 그야말로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왠만한 전망대 못지않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에도 나만의 이름을 붙여본다. 언덕 아래로 노랗고 하얀 계란후라이 꽃이 가득 피어 있었으니, 이곳은 Mirador de Huevos fritos, 계란후라이 전망대라고 하자! 하하하..
모두들 앉아있는 동그란 돌담에 올라가 서 보니 저녁, 멀리서 불어오는 안달루시아의 바람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가슴이 탁 트인다! 이곳의 하늘은 정말 특별하다. 누군가 이곳 하늘을 깨끗한 과달끼빌 협곡의 물에 한번 담갔다 뺀 것이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면 왜 저렇게 특별한 빛으로 특별한 색으로 빛나겠는가.
멀리서 시차적응을 못하고 있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언덕을 내려온다. 길이 없는 곳으로 걸어 내려와 담을 타고 내려왔다.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담을 타고 내려와 맞은 편 골목으로 올라가 언덕 위에서 봐 두었던 동굴집을 구경했다.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진 못했는데, 이곳은 아마 허가받은 동굴집 인 것 같았다.
그라나다에는 실제로 아직도 동굴집이 많이 있다.
집시들이 동굴에서 살기 시작한 기원이긴 하지만, 오늘날에는 집시가 아닌 사람들도 동굴에서 사는 경우도 종종 있다.
동굴집에는 허가를 받은 동굴집이 있고 허가를 받지 않은 동굴집이 있는데, 허가를 받은 동굴집은 전기도 들어오고 물도 들어와서 왠만한 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동굴 특유의 탁월한 온도와 습도 조절능력으로 1년 내내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수 있고, 동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대자연의 아늑함 또한 그런 동굴집 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곳에 있는 동굴집에도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불러 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린다.
골목을 올라오는 소년에게 인사를 하고 이곳에 사는지 물어보자 쑥스러운 듯 그렇다며 대답을 하고 총총 걸음으로 가던 길을 간다. 귀엽다.
동화 속 그림 같은 치유의 전망대
친구 하나를 알바이신의 집에 데려다 주고 나와 다른 친구는 알바이신을 좀 더 걷기로 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 덧 다로강변에 다다라, 오늘 따라 더 투명하고 맑은 밤하늘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알람브라를 보고 감탄을 하면서 플라자 누에바에 다다랐다.
플라자 누에바 구석의 한 골목으로 올라가서 멋진 뷰를 가진 곳을 발견한 적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좁은 계단길을 올라간다.
오르고 또 오르고 걷고 또 걷고 생각보다 꽤 올라가다 주위를 보니 어느 새 그곳은 한적한 주택가.
현지인들이 조용히 하루를 마치고 시작하는 주택가의 한 켠에 그곳이 있었다.
길 한켠 마련된 작은 공간에 탁 트인 전망은 온통 알바이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라나다의 거의 모든 미라도르들은 알람브라를 향한다.
하지만 알람브라에서 알바이신을 바라보는 전망또한 그에 못지않게 멋지고 훌륭하다!
알람브라의 나스리 궁전에서 바라보는 알바이신의 뷰, 미라도르 데 씨야 데 모로에서 바라보는 알바이신의 뷰, 까를로스 낀또의 궁전 앞에서 바라보는 알바이신의 뷰가 그 중에서도 예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알바이신을 담은 미라도르 중에서도 이곳의 뷰는 정말 온전히 알바이신 그 자체를 담아내는 예술적인 전망이다!!!!!!
반짝반짝 켜진 저 불빛은 알바이신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빛이다.
친구는 얼마 전 그곳에 다른 친구와 함께 온적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 주인없이 놓여있는 책이 있어 그 책을 열어 보니, 이 책을 만난 당신은 행운의 주인공입니다! 라며,
그 책의 아름다운 글들을 읽고 또다른 누군가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면 다른 어딘가에 이 책을 놓아주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는…
그리고 그 책은 그 책을 주워 든 친구를 따라 아마 바르셀로나 어딘가에 놓여져 있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곳에서 바라 본 알바이신의 동화같은 전망은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또다른 나만의 이름으로 '치유의 전망대' 라는 이름을 붙여 본다.
쉿! 그 길가의 오디 열매는 고양이들의 초대장!
치유의 전망대에서 한참을 알바이신을 바라보며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발걸음을 돌린다.
돌아가는 골목길 어느 집 담장 안에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를 보더니 친구가 뽕나무 란다!
자세히 보니 오디 열매도 맺혀있다! 너무 신났다! ^^
아직 덜 익은 오디 열매 사이로 몇개의 익은 열매를 따서 그 새콤한 맛을 음미하며 길을 걷다 보니,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야옹 거리며 우리를 바라본다.
이 녀석,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고, 왠지 사람 손을 탄 고양이 인 것 같다.
배가 고픈가봐 하면서 오디 열매를 주었지만 냄새를 맡더니 먹지 않는다. 까다로운 녀석.
그래도 사람이 좋은지, 아니면 먹을 걸 좀 달라는 건지 자꾸 내 다리에 몸을 문지르며 우리를 따라온다.
천하장사 소세지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고 미안해서 쓰레기통이라도 뒤져보지만, 역시나 먹을 건 없다.
한낮 팔자 좋아 보이는 길고양이의 삶도 우리네 삶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고되다.
자꾸 우리를 따라오는 녀석을 보면서, 광장까지 따라오면, 타파스 가게에서 타파스를 시켜서 좀 떼어 주자고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데,
골목길 어귀까지 따라오던 녀석이 계단 참에 앉아서 더이상은 따라오지 않는다.
미안한 눈짓으로 뒤를 돌아보며 인사를 하고 좁은 골목으로 내려온다.
길가에는 바닥공사 중이었다.
이곳의 바닥은 타일이 아니라 돌을 깐다.
아이 주먹 정도 되는 하얀돌 회색돌로 무늬를 만들어 깔고 시멘트로 고정시킨다.
바닥이 좀 울퉁불퉁하긴 해도, 멋없는 타일보다 훨씬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울퉁불퉁한 돌길이 다소 불편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흐름이 고스란히 묻어나 아름다움을 더하는 돌길이 너무 좋다.
우리나라에도 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뒤집어 엎는 타일 말고 이렇게 정성스럽게 돌길을 깔았으면 좋겠다.
무늬도 예쁘게 디자인 하고, 걷는 사람들에게 즐거움도 선사할 겸.
바닥공사를 하는 골목을 지나는데, 저만치 앞에 얼룩 고양이 세 마리가 나란히 동상처럼 앉아있는 게 보인다.
꺄악. 정말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그 고양이들에게 다가가려는데 조금 더 앞쪽에 다른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얼굴 반쪽만 빼꼼히 내밀고 우리를 바라본다.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는데 굳이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나무 뒤에서 노랑색의 이쁜 얼룩 고양이 한마리가 더 나오고, 그 뒤를 따라 나이가 많이 든 듯한 혹은 어딘가 아픈 것 같은 덩치가 큰 하얀 고양이가 따라 온다.
그 고양이들을 따라 가다 보니 골목길의 끝에 작은 광장 전체가 인간의 손길 보다는 고양이들의 손길이 가득한 곳으로, 마치 고양이들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 장소에 와 있었다!
그래서 길고양이를 조심해야 돼. 무턱대고 따라가서 고양이들의 나라에 들어갔다가는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니까.
우리가 들어선 고양이들의 나라를 빠져나오는 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예쁜 고양이들을 차마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알고보니 그곳은, 알람브라를 올라갈 때 언제나 살짝 고개를 돌려보면 대여섯 마리의 고양이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던 작은 골목과 이어진 곳이었다.
언젠가 또다시 고양이들의 초대를 받게 되면 그곳에 찾아와 나의 새로운 그라나다 친구들을 만나리라.
특별한 것은 없지만 특별한 어느 하루
사진은 많이 찍지 못했다.
폰이 밧데리가 일찍 닳아서 특히나 야경은 더더욱 찍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산책의 이 특별한 느낌을 기억하고 싶었다.
누에바 광장의 좁은 골목으로 걸어들어가 만난 동화같은 전망을 가진 치유의 전망대,
그리고 검은 고양이의 초대를 받아 들어간 고양이의 나라와 그곳에서 돌아서며 친구와 따먹은 오디 열매.
엘레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고백이 아직도 선명한 로맨틱 전망대와 계란후라이 꽃이 가득한 계란 전망대.
그림 같은 동굴집과 한 잔의 모스토, 타파스로 먹은 맛있는 정어리 튀김까지.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던.
하지만 기록해두지 않으면 언젠가 쉽게 잊혀질 것 같은 소중한 오늘을 이곳에 담아본다.
나의 완벽한 추억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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